‘Good will hunting’ 기억에 남는 장면과 감상
‘Good will hunting’ 장면 1
어린 시절 양부에게 학대받던 회상 장면입니다.
친부모에게 버림받은 윌은 입양되어 만난 아버지에게 지속적인 구타를 당했습니다. 윌은 계단을 올라와 어린 윌에게 폭력을 행사한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를 숀에게 무척 담담하게 전하려고 애씁니다. ‘어릴 적 학대 정도는 나에게 큰 문제가 아니다.’라고 과거의 기억을 제 3자의 이야기처럼 표현하려는 듯 보였습니다.
윌은 사람들을 대할 때, 상대방의 약점을 빨리 잡아내 상대보다 우위에 있다는 것을 드러내려 합니다. “당신들이 어떤 말과 행동을 해도 난 끄떡없다!” 는 것을 보여주려 하지만 숀은 그런 윌의 내면 깊숙한 고통을 짚어 줍니다.
‘그런 식의 표현은 자신을 속이는 것이니 좀 더 너에게 솔직해봐!’가 아니었습니다.
“너의 잘못이 아니야...”
윌에게 주어졌던 어린 시절의 환경도, 윌의 천재성도, 윌의 거침도, 윌의 선택이 아니었습니다. 숀은 스스로를 학대하고 주변을 향해 날을 세우는 윌에게 더 이상 그러지 않아도 된다고 말합니다.
‘Good will hunting’ 장면 2
친구 처키 설리번이 윌에게 떠나라고 하는 장면입니다.
입양과 파양을 반복해 온 윌에게는 가족보다 친구가 더 가깝고 의지하는 대상입니다. 막노동을 하며 친구들과 맥주도 마시고 어울려 다니는 삶이 윌에게는 안식과도 같습니다. 윌은 램보교수가 주선한 신분 상승을 할 수 있는 안정된 직장의 면접을 무성의하게 보거나 펑크를 냅니다. 아마 윌은 친구들과 떨어져 다른 삶을 사는 것을 피하고 싶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 윌의 마음을 읽은 처키는 이야기합니다. 여느 때처럼 아침에 차를 타고 윌의 집에 들러 윌을 부르며 문을 열었을 때 윌이 보이지 않기를 희망한다고 말합니다. 세월이 흘러 자신의 옆에서 함께 막노동을 하고 있는 윌을 원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처키의 말에 윌은 익숙한 현실을 벗어나고 싶어 하지 않는 스스로를 돌아보게 됩니다.
‘Good will hunting’ 장면 3
엔딩 부분에 친구들이 선물한 고물 차를 몰고 헤어진 여자 친구 스카일라를 만나러 서부로 떠나가는 장면입니다.
윌은 친구들과 몰려 간 하버드대학 부근 술집에서 스카일라를 우연히 보게 되고 호감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내세울만한 학력이나 배경은 없었지만 윌의 천재성은 하버드대생을 보기 좋게 망신 주는데 발휘됩니다. 이를 옆에서 본 스카일라는 윌에게 관심을 가지게 되고 둘의 관계는 깊어집니다. 하지만 처음부터 자신의 처지를 사실대로 말하지 못했던 윌은 스카일라가 서부에 있는 대학원에 간다고 하자 또 버림받는 것이 두려워 결별을 선언합니다.
윌은 과거에 누군가와 사랑을 하면 배신을 당해 후회한 경험이 있었습니다. 윌이 내면의 상처를 극복하기 위해 새로운 길을 선택하는 첫 발을 서부로 선택한 이유인 듯 보였습니다.
‘Good will hunting’에 대한 감상
입소문이 자자해 1997년 미국에서 개봉한 이후에도 지금까지 사람들이 찾아보는 아는 사람은 다 아는 영화입니다. 대개 청소년 교육현장에서 자주 활용되는 장면이 많은 영화이기도 합니다.
이 세상을 사는 우리는 이상적인 삶을 추구하지만 현실에서는 저마다의 아픔과 시련을 가지고 있습니다. 부모님이 계시고 자녀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려 노력하고 경제적으로도 안정된 가정을 누구나 원할 것입니다. 평범한 것이 가장 어렵다는 말처럼 이런 평범해 보이는 가정에서 성장하는 것은 축복이란 생각이 듭니다.
친부모님에게 버림받고 입양된 가정에서도 폭력에 시달린 아이라면 윌처럼 성장한 것도 다행일 수 있다고 보입니다. 윌은 타고난 두뇌 활동 때문에 위기의 상황을 모면해 오지 않았나 싶습니다.
비록 막노동을 하고 거리의 친구들과 어울려 다니지만 윌은 스스로의 능력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많은 술집을 놔두고 하버드대학의 술집에 친구들과 몰려간 것도, 청소부 일이라면 가까운 곳에서 찾을 수도 있었을 텐데 MIT에서 청소를 한 것도 그런 이유일 것입니다.
나이를 먹고 신체가 성장한다는 것과 성숙한 어른이 된다는 것은 별개입니다. 우리 사회가 혼란스럽고 이기적으로 보이는 것도 나만의 세상에 갇혀 새로운 세상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원인은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이기적으로 보이고 거기에 타인에게 불편을 주는 사람들을 개인적으로 만나 이야기해 보면 다 나름의 이유가 있습니다. 자신은 그렇게 살아왔고 그것이 정당한 것입니다. 세상을 향해 날을 세웠던 윌처럼...
하지만 조금만 마음을 열고 주위를 살펴보면 조용히 남을 배려하는 분들이 계십니다. 숀처럼 상담 교수가 아니어도 직업에 상관없이 바닥에 버려진 휴지를 슬쩍 줍기도 하고, 버스에 오를 때 뒷사람에게 양보도 하고, 횡단보도에서 느릿하게 걷는 행인을 끝까지 기다려 주었다 운전하는 분들은 주의해서 보지 않으면 눈에 띄지 않습니다.
모두가 나를 향해 손에 돌을 쥐고 있는 것이 아니라 자세히 보면 그 손을 뻗어 잡아 주려는 분들 일 수 있습니다. 장미의 가시를 볼지 꽃의 아름다움을 감상할지는 각자의 몫이란 생각을 하게 만든 영화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