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책로 한 바퀴를 돌고 왔을 때 뭔가 허전함을 느꼈다. 감정은 조금 누그러져 있었지만 뭔가를 잃어버린 혹은 놓친 기분은 쉽게 떠나지 않았다.
눈을 떠 어제 먹던 치킨볼과 스파게티를 꾸덕꾸덕 삼킨 오늘 아침은 그때로부터 6개월이 지나 있었다.
며칠 전, 우연히 둥이의 팔짱을 끼고 시장에서 나오는 탕아를 보았다. 대체 무엇 때문인진 모르지만, 본능적으로 저 둘이 하봉을 보기 전에 빠른 속도로 돌아서 모퉁이에 몸을 숨겼었다. 돌아오는 길에 탕아를 아는 친구들과 약속을 잡았고, 어제는 그들과 늦게까지 와인에 탕아의 행태를 안주 삼아 회포를 풀었다. 웃고, 열 내고, 떠들고 돌아왔지만, 마음 한 귀퉁이에 찜찜함은 가시지 않았다.
20년간의 무시와 정서적 학대를 몇 마디 말로 무마하려는 탕아의 뻔뻔함을 받아줄 마음은 없었다. 주변에 하봉을 동정하고 공감하는 친구들의 응원을 받았지만, 막상 다시 탕아를 마주하면 매몰차게 돌아설 수 있을까? 스스로에게 물었을 때 하봉은 “당연하지!”를 외칠 자신이 없었다. 드라마나 영화 속 주인공들은 단호하게 변모하는 모습을 보이는데 하봉에겐 왜 그리 힘든 걸까? 이 또한 자기 확신에서 비롯된 것이라……
‘확신’이란 단어는 하봉의 삶에서 멀리 떨어져 위치하고 있었다.
왜 사람들은 감정을 숨기고 반대로 행동하거나 말해야 할까? 만약 둥이가 유아 앞에서 방귀를 참지 못한 상황을 아무렇지 않게 넘겼다면 어땠을까? 풋풋한 10대, 처음으로 관심이 갔던 이성에게 민망한 장면을 연출했지만 피해 다니지 않고 자신의 속사정을 있는 그대로 자연스럽게 말할 용기가 있었다면……? 아마 얼굴에 반사판을 댄 듯한 유아라도 사람이기에 먹고 싸고 자고 할 것이었다.
“너라면 어떻게 했을 것 같아?”
“…… 아마 그것 때문에 피해 다니진 않았겠죠.”
술자리에서 유아와의 이야기했을 때 둥이는 유아가 방귀를 뀐다는 것은 상상이 어렵다고 했었다. 만약 둥이가 아닌 유아가 그 날 방귀를 뀌었다면 어떻게 했을 것인지 물었을 때, 둥이는 유아를 피해 다니지는 않았을 것이라 했다.
하봉은 둥이가 유아의 일을 겪고 부끄러움에 대해 생각했다는 말을 들었었다. ‘엄마’는 둥이가 가장 가까이서 오랫동안 접한 여자였다. 엄마 앞에서는 트림이나 방귀를 거리낌 없이 분출했다. 한 번도 엄마는 그런 둥이를 부끄러워하거나 뭐라 하지 않았다. 며칠을 유아와의 일을 이리저리 돌아보다 ‘엄마’에게 생각이 머물렀다.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주는 이 세상의 유일한 ‘엄마’를 둥이도 정당하게 대우해야 한다는 마음이 들었다고 했다.
순댓국집에 문을 열고 성큼성큼 들어가 순댓국 한 그릇을 다 먹은 둥이는 자신의 테이블을 치웠다. 멍하니 그런 둥이를 보던 순댓국집 아주머니는 나지막이 웅얼거렸다.
“사람이 변하면 죽을 때가 됐다던데……”